19. 새로운 시작




  5년 후.

  은색의 벤츠 E 클래스 차량 한 대가 다영의 병원 앞 사거리 모퉁이에 천천히 멈춰 섰다. 운전석에 앉아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는, 진한 군청색 정장에 묘하게 어울리는 보랏빛 넥타이를 한 그 사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한서가 틀림없었다.


  “다영씨, 지금 여기 앞에 도착 했거든요?


  분명히 ‘다영씨’라고 했다. 줄곧 ‘선생님’ 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러 왔던 그녀를 한서는 지나치리만큼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많은 일,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모습 이었다.

  잠시 후, 하늘거리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5년 전 보다 다섯 배는 더 예뻐진 다영이 조수석 문을 덜컥 하고 열었다.


  “지금, 강원랜드 갈 수 있을까요?”


  다영의 말에 한서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톨 비 포함해서 20만원 정도인데......, 오늘은 특별히 공짜로 모셔다 드리죠.”


  한서와 다영이 서로 마주 보며 환 하게 웃었다.


  “새 사무실은 어때요? 에어컨 없어서 많이 덥죠?”


  “아니, 오늘 오전에 기사가 와서 달아 주고 갔어요.”


  “어? 정말? 나한테는 성수기라서 열흘은 더 걸린다고 그랬었는데?”


  다영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설치 기사 하고 작은 딜을 했죠.”


  “워......, 역시 도박사!”


  “그냥 회계사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한다영 교수님?”


  강원랜드로 향하는 한서와 다영은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들에게 참으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 택시 기사와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이름 모를 아가씨로 만난 게 바로 엊그제 일 같았다. 그 후로는 도박 중독자와 정신과 주치의로 또 지금은 누가 봐도 가깝고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한서는 태삼이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모대로 ‘확실한 것에 먼저 배팅’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박을 잘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그에게 가장 확실한 첫 배팅은 그의 꿈이었던 회계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엄밀히 말하면 회계사는 그의 주업은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투자 할 수 있는 시드머니가 있어야 계속해서 배팅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한서는 정기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수단으로써 회계사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박에 처음 손댄 이후, 회계사 공부는 말 할 것도 없이 도박 이외의 일은 그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쏟을 수 없었던 그였지만 회계사가 되는 것이 도박을 위한 시드머니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 하니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다영이 내린 처방이 확실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한서는 결국 회계사가 되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자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을 이용해 강원랜드에 다시 출입하기 시작했다. 태삼이 가르쳐 준대로 그리고 스스로와 약속한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룰을 지켜 게임에 임했다. 게임 시간은 절대로 열 시간을 넘기는 일이 없었고, 배팅은 철저하게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의 100분의 1의 시드로 또 시드의 100분의 1을 최대 배팅액 으로 정했다.

  처음엔 보잘 것 없던 그의 수익 규모도 그가 수련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깨달았던 복리의 마법이 그 진가를 발휘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드의 규모는 날마다 커졌고 재산도 그만큼 늘어가기 시작했다.

  회계사가 된지 이 년 째 되는 해에 그가 잃었던 돈을 모두 복구할 수 있었고, 5년 째 되는 해에는 염창동에 작은 아파트도 한 채 마련 할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인생 역전이었다. 한서는 여전히 도박을 끊지 못했지만 도박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다영 또한 한서가 겪은 일로 인해 그녀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박 중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연구 논문이 학계뿐 만 아니라 산업계에도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지난해에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세계의 의사 탑 50’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5년 전, 다영이 한서에게 했던 말 그대로 한서의 성공은 곧 그녀의 성공이 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다영의 마음 한 편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 사람이 도박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하나의 성공 케이스에 머물러 있었다. 도박 중독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서와 같이 새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번번이 실패했다. 이상은 이론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한서씨가 좀 해주면 안 돼요?”


  오늘도 다영은 한서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선수는 코치가 될 수 없다니까요. 언젠가 스승님이 나타나시겠죠.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5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라 구요?”


  다영의 계획은 사람들에게 카지노 게임을 잘 하도록 가르쳐 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학원의 형태일지 학교의 모습이 될지는 그녀조차도 아직 막연하기만 했지만 막대한 자본력을 통해 사람들을 호구로 삼아 나날이 발전하는 카지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 역시 체계적인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것은 허울만 좋은 ‘도박 중독 예방 센터’ 보다 오히려 더 도박으로 인해 삶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 이었다.

  도박은 나쁜 짓이 아니라 단지 위험한 투자 상품일 뿐이라서 배우고 학습해야 하는 거라고 수 없이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뜻에 지지의 뜻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직 이론에 불과한 허상일 뿐이었다.

  다영은 태삼이 그녀의 계획 중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한서에게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었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태삼은 그녀의 마지막 부탁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태삼이 없는 지금, 다영의 유일한 희망은 태삼의 수제자인 한서 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녀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하기만 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인생을 걸고 무모한 도박을 하는 것과 같아요.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한서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깊은 바다 속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이제 막 겨우 숨을 트게 된 그에게 다른 사람까지 구조해 달라는 얘기는 너무나도 가혹한 부탁임엔 분명 했다.




Copyright 2017. Jack Park(Card Counter) all rights reserved